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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과 악마사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 시험전

 
시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답은 존재자들이 아닌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족한다면 시험에 들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리워진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내 손에 쥘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죠.
그리고 즉각즉각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원해요.
 
돈이 그런 능력을 갖습니다.
그래서 돈은 유사 전능성을 갖습니다.
예수님도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섬김의 대상인데 '맘몬'도 섬김을 원한다.
인간이 돈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는 순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한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돈중독에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됩니다.
 
그래서 잘 주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인간은 필요할때 탐욕이 일어나지 않고 가졌을때 오히려 풍족할 때 탐욕이 일어난다고 몽테뉴가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 주면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선행을 하면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러나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는 좋은 일을 내 공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그 마음을 일으켜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다 행한 선한 일은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일으켜주신 마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내가 일으키는 마음은 죄악일 뿐이라고 보는거죠
 
누군가에게 선행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선행이 썩 유쾌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행을 하고 내색하는 것.
 
내가 어떤 선행을 베풀었어요. 그러나 그 선행을 베푼 대상이 된 사람들이 자기 기대만큼 감격을 표현 안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얘기 안하면 속상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선행을 행하는 이유는 잘 줄줄아는 자아를 충족하는 사람입니다.
김수영 작가가 하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느날 종로 5가 쪽으로 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 동전 한닙을 주고 갔는데
속으로 '나 꽤 선한일을 했어'
 
그런데 그는 시인답게 자기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내가 얼마나 허위 의식에 사로잡혀있는가.
 
그런데 선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선에 방향이 고통받는 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이 나를 근사하게 포장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악취가 나옵니다.
 
어떤 교회는 십일조 하는 순서대로 기도해주기도 하고
그래프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선행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은 악취가 납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고 있는 선행은 무엇입니까
선행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그 마음아픔에 공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구삼아 나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했습니다 
겉에는 회를 발라놔서 깨끗해 보이지만 안에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있다.
그래서 선행은 방향에 따라서 악행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방향은 간단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선행이 그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구별해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시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하지 마소서'

 

사막에 가면 시험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의 광야시험에서 보여줍니다.
떠오르는 시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자기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어요. 

 

인간은 자기를 반복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내가 아무리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가졌어도 자기를 반복하는게 인간 존재의 모습입니다.
 
우리 속에 이미 세상이 들어와있다.
내 속에 이미 시장이 작동하고 있고, 사람들의 평판을 다루고 있는 무대도 주어져있고
온갖것들이 들어와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달아날 수가 없다.
이게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때떄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슬프기도 합니다.
몸이 가지는 욕망이 있습니다. 잠자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고.
그러나 몸을 가지고 있는게 참 좋을 때도 있습니다.
서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손을 잡아주거나, 토닥토닥해준다던지.
 
  • 이야기 : '베를린 천사의 시' 천사가 유일하게 할 수 없는 일이 뭐냐면 고통을 느낄 수가 없는거에요. 그런데 인간을 보니까 너무나 서럽고 힘든데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일이 너무나 부러운 거에요. 그래서 천사는 인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봇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그런 말들을 통해서 세상을 익히고 있습니다.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 늘 우리는 시험에 드는 존재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하지 말아달라는 기도는 한번만 하는게 아니라 매번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에 들더라도 돌이킬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야하는 까닭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있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나입니다.
헬무트 틸리케가 말합니다.
부자청년과 예수님이야기에서 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나' 입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은폐하는 것이 보통인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천박한 호기심을 품으면서, 잡담하면서, 자기를 비교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신앙에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실체를 보지 않고 살다가
진정한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자각하고 인정받으려고 애썼던 자기를 인정하고
자기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그 때 
그는 본래적 자기의 모습과 대면하고 있다고 철학적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깊은 고독 속에 있게 될때 자기와 대면하게 되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시험받았다는 말에 핵심입니다.
 
광야라는 곳에서, 그 절대적인 고독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자기속에 있는 유혹 앞에서 맞딱뜨린 것이고,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것들을 예수의 시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시험들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나 다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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