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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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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풀꽃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3 기죽지 말고 피워봐 꽃 피워봐 참 좋아
김정완 - 조와(弔蛙) | 수필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끓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하며 또한 찬성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운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
함석헌 - 얼굴 이슬에 젖어 반짝이는 들판을 뚫고 닫는 큰 길 위에 기운 좋게 내리쏘는 아침 햇빛을 받으며 배바삐 오고 가는 저 얼굴들, 무엇하러 어디로 가는 얼굴들인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 잡으러 무엇 보러 누굴 보러 뉘게 뵈러 가는 얼굴들인고? 남자 얼굴, 여자 얼굴, 젊은 얼굴, 늙은 얼굴, 아직도 잠이 아니 깬 얼굴, 무슨 꾀를 그리는 얼굴, 우멍한 얼굴, 뻔뻔한 얼굴, 간사한 얼굴, 얄미운 얼굴, 어떤 거는 기름때가 번지르르 돌고, 어떤 거는 수수깡같이 빼빼 마르고, 젠 체 입을 다문 것, 반편만치 침을 지르르 흘리는 것, 영웅심에 들뜬 청년, 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 실망한 얼굴, 병에 눌린 얼굴, 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 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 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 참 아름..
안도현 - 새해 아침의 기도 새해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조아리고 어깨를 낮추어 살아가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나 아닌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꿇어앉아 기도하게 하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평화의 강이 되어 출렁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뉘우치게 하소서.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과, 남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던 불끈 쥔 주먹을 부끄럽게 하소서. 무심코 내뱉은 침 한 방울, 말 한 마디가 세상을 얼마나 더럽히는지 까맣게 몰랐던 것을 부끄럽게 하소서.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새해에는 부디 뉘우치게 하소서. 새해에는 스스로 ..
때밀이 수건 - 최승호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無明)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 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양(羊)들.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양(羊)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입으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이 때 묻은 성의(聖衣)는 누가 빠는지. 죽음이 우리들 때를 밀러 온다. 발 빠지는 진흙 수렁 늪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진탕 놀다온 탕아를 씻어 주는 밤의 어머니, 죽음이 눈썹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들 알몸을 기다리신다. 때 한 점 없을..
시 | 내 마음 다 팔았고나 - 함석헌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다 팔아먹고, 다 헤쳐먹고, 이젠 껍데기만 남았고나. 님 생각이 나는 오늘엔 바쳐야 할 그 맘은 없고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더러운 기록을 그린 이 껍질 밖에 없으니 무엇으로 님을 만나? 무슨 맘에 님을 찾나? 속았구나! 세상한테 속았구나! 그 사탕에 맘 팔고, 그 옷에 맘 팔고, 고운 듯 꾀는 눈에 뜨거운 맘 다 팔고 피리 소리 좋은 듯해 있는 맘 툭 털어주고 샀더니 속았구나, 속 없는 세상한테 속았구나! 해는 서산 위에 뉘엿이 눕고 내 몸은 피곤하고 저녁 바람은 가벼이 불 때 다 팔고 남은 내 맘의 껍질..
시 |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