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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

때밀이 수건 - 최승호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無明)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 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양(羊)들.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양(羊)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입으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이 때 묻은 성의(聖衣)는 누가 빠는지.
 
죽음이 우리들 때를 밀러 온다.
발 빠지는 진흙 수렁 늪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진탕 놀다온 탕아를
씻어 주는 밤의 어머니,
죽음이 눈썹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들 알몸을 기다리신다.
때 한 점 없을 때까지
몸이 뭉그러져도 말끔하게 때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죽음,
죽음은 때를 미워해
청정한 중의 해골도 씻고 또 씻고
샅샅이 씻어 몸을 깨끗이 없애 버린다.

그렇다면 죽음의 눈엔 온몸이 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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