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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

시 | 내 마음 다 팔았고나 - 함석헌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다 팔아먹고,
다 헤쳐먹고,
이젠 껍데기만 남았고나.
님 생각이 나는 오늘엔
바쳐야 할 그 맘은 없고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더러운 기록을 그린
이 껍질 밖에 없으니
무엇으로 님을 만나?
무슨 맘에 님을 찾나?

 

속았구나!
세상한테 속았구나!
그 사탕에 맘 팔고,
그 옷에 맘 팔고,
고운 듯 꾀는 눈에
뜨거운 맘 다 팔고
피리 소리 좋은 듯해
있는 맘 툭 털어주고 샀더니
속았구나,
속 없는 세상한테 속았구나!

 

해는 서산 위에 뉘엿이 눕고
내 몸은 피곤하고
저녁 바람은 가벼이 불 때
다 팔고 남은 내 맘의 껍질은
물 마른 우물같이
텅 빈 쓸쓸함만 길었는데
님은 저 언덕을 올라가시네,
저녁 영광 안으시고.

 

저 님이 가시기 전,
저 님이 저 언덕을 아주 넘으시기 전,
가자, 내 맘아,
이 가엾은 내 맘아,
팔다가 남은 부스러기라도 모아 가지고
가서 바치자.
받으시거나 아니 받으시거나
발 앞에나 쓰러지자!

 

세상아 네 맘을 도로 주어!
이 껍데기 세상아
내가 날 속여 껍데기로 만들었지만
네게 줄 내 맘이 아니었더니라.
님께 바쳐야 할 내 맘을
도로 내놓아, 어서 내놓아!
내가 본시 네게서 받은 것이 없었노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이 잊혀져가고

오직 나와 예수님만이 계실때

 

빈 껍데기.

속은 어디로 갔는지

그세 어디다 팔았는지

들여다보니 없었다.

 

그분과 마주보자니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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