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수필

안도현 - 새해 아침의 기도

새해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조아리고 어깨를 낮추어 살아가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나 아닌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꿇어앉아 기도하게 하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평화의 강이 되어 출렁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뉘우치게 하소서.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과, 남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던 불끈 쥔 주먹을 부끄럽게 하소서. 

무심코 내뱉은 침 한 방울, 말 한 마디가 세상을 얼마나 더럽히는지 까맣게 몰랐던 것을 부끄럽게 하소서.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새해에는 부디 뉘우치게 하소서.

 

새해에는 스스로 깨우치게 하소서. 

내 배부를 때 누군가 허기져 굶고 있다는 것을, 내 등 따뜻할 때 누군가 웅크리고 떨고 있다는 것을, 내 이마에 햇살이 닿을 때 누군가의 등에는 그늘이 지고 있다는 것을 새해에는 알게 하소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길 때 내 발 밑에 밟혀 죽는 작은 벌레와 풀잎이 있다는 것을, 내 발길에 채여 구르는 돌멩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새해에는 연약한 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빛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외롭고 쓸쓸한 것들의 옆에다 내 몸을 세워 주소서. 

울긋불긋한 네온사인 아래 부초처럼 떠돌게 하지 마시고, 고요한 촛불 하나에 마음을 단단히 기대게 하소서. 

목청 높여 삿대질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뒤로 물러앉게 하시고, 가슴에 오래 남는 낮은 목소리의 사람을 앞으로 바투 다가앉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하소서. 

하지만 사랑해요, 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오고가는 눈빛으로 사랑을 확인하게 하소서. 

사랑 때문에 헤어져 아프게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새해에는 다시 사랑의 연둣빛 싹을 틔울 수 있게 하소서. 

저 실업과 노숙의 거리,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골목길의 어둠을 새해에는 물리치게 하소서.

 

새해에는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세월 동안 잘 먹고 잘 입으며 떵떵거리며 살아온 사람들을 부디 호되게 꾸짖어 주소서. 

그들이 통일로 가는 기관차를 가로막으려거든 크게 크게 기적을 울려 화해와 상생의 길을 함께 걷도록 해주소서. 

새날은 기다린다고 오는 아니라 발벗고 찾아 나서야 오는 거라고, 새해에는 자신 있게 말하게 하소서. 썩은 물은 나가고, 맑은 물은 들어오게 하소서.

'시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완 - 조와(弔蛙) | 수필  (0) 2022.03.06
함석헌 - 얼굴  (0) 2022.02.27
때밀이 수건 - 최승호  (0) 2021.12.29
시 | 내 마음 다 팔았고나 - 함석헌  (0) 2021.08.17
시 | 방문객  (0) 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