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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

함석헌 - 얼굴


이슬에 젖어 반짝이는 들판을
뚫고 닫는 큰 길 위에
기운 좋게 내리쏘는 아침 햇빛을 받으며
배바삐 오고 가는 저 얼굴들,
무엇하러 어디로 가는 얼굴들인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 잡으러 무엇 보러
누굴 보러 뉘게 뵈러
가는 얼굴들인고?

남자 얼굴, 여자 얼굴,
젊은 얼굴, 늙은 얼굴,
아직도 잠이 아니 깬 얼굴,
무슨 꾀를 그리는 얼굴,
우멍한 얼굴, 뻔뻔한 얼굴,
간사한 얼굴, 얄미운 얼굴,
어떤 거는 기름때가 번지르르 돌고,
어떤 거는 수수깡같이 빼빼 마르고,
젠 체 입을 다문 것,
반편만치 침을 지르르 흘리는 것,
영웅심에 들뜬 청년,
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
실망한 얼굴,
병에 눌린 얼굴,
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
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
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
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

참 고운 얼굴이 없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얼굴,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저 많은 얼굴들 저리 많은데
왜 그리 다 미울까, 다 더럽기만 할까!

아침 바람처럼 맑은 얼굴,
저녁 하늘처럼 영광스러운 얼굴,
그 얼굴을 내가 찾건만!
구룡연(九龍淵)의 폭포 같은,
천지의 깊음 같은,
융프라우 솟은 듯한,
히말라야 틀진 듯한,
그 얼굴을 내가 그리건만!
지심에서 하늘에까지 닿는 거목같이 싱싱한,
굳게 찡그린 바위의 가슴을 터치고 웃는 꽃 같은,
그 얼굴을 내가 한 번 만나고 싶건만!
아아, 아무데서도 볼 수 없는 그 얼굴!

푸른 수리는 무슨 일로 봉 위에 빙빙 돌고,
은결 잉어는 무슨 일로 물결 속에 꼬리쳐,
그 얼굴을 간 곳마다 그리게만 하는 거며,
해 달은 어이하여 밤낮으로 숨기내기를 하여
비쭉거리는 그 얼굴로,
구름놀은 어이하여 동 서 남 북 춤을 추어 흔들거리는 머리채로,
그리면서도 못 보는 그 얼굴에
항상 감질만 나게 하는 거냐?
세상에선 볼 수 없는 그 얼굴을,
그 살아 싱싱한 얼굴을, 참 아름다운 얼굴을!

아, 내 마음 급해!
내 가슴 타!
내 눈 흐리고
내 숨 헐떡여 끊어지려 하네!
그 얼굴 하나
그 산 얼굴 하나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
우리 삶이지.
시간의 끝없는 물결
들고 또 나는
영원의 바닷가에,
한없는 모래밭에,
오르며 또 내리며
헤매어 다니면서
진주 한 알 얻어 들잠이
우리들의 삶이지.

그러나 내 맘아, 답답한 이 내 맘아
너는 가엾이 어리석구나.
거품진 물결 위에 비치어 부서져 나가는
네 얼굴의 어지러움 너는 왜 못 보느냐?
못생긴 내 얼굴에
어느 고운 얼굴 향할 것이며,
흐리운 네 그 시선에
어느 맑은 시선 끌려올 것이냐?
주검을 보고 독수리는 몰려오고
샛별이 웃어야 해가 따라 오는 줄을
너는 왜 모르느냐?
그러나, 아아 그러나,
내 얼굴 더럽고
내 눈은 티끌에 흐리우나
내 맘엔 항상 어른거리는 그 얼굴!
그리어 늘 못 잊는 그 산 얼굴, 그 영광의 얼굴!

팔레스타인 빈 들에 먼동 트는 새벽 하늘에
샛별같이 빛나던 그 얼굴,
팔복산 기슭에 아침 해 안고
이슬 머금은 백합같이 향기 맑던 그 얼굴,
풍랑 일어 하늘에 닿는 갈릴리 바다 위에
태산처럼 누워 평안히 잠자던 그 얼굴,
헤르몬 산 꼭대기 채색 구름에 싸인 낮에
번개보다 더 눈부시게 두루 비치던 찬란한 얼굴,
죽음의 동굴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벗 찾아
눈물 뿌려 통곡하던 그 얼굴,
호산나 찬송 속에 새끼나귀 등에 앉아
온유 중에 광채 쏘던 임금다운 그 얼굴,
채찍 들어 소리치고 도둑 무리 내몰면서
아버지 집 내놓으라고 진노하던 그 얼굴,
떡 떼고 잔 들면서 내 살이다 내 피다
새 약속 맺으시던 마지막 그 저녁에
엄숙하고 비장하시던 그 얼굴,
겟세마네 밤 깊을 때 쓴 잔 들고 땅에 엎대
피 땀에 어리어 애원하시던 그 얼굴,
가시관 쓰고 어둠의 권세 앞에서
바람 잔 저녁 바단 듯 잠잠 하시던 그 얼굴,
골고다 언덕 위에 엘리엘리 부르시며
호곡하는 무리 형틀에서 굽어보시고
나는 말고 너희 위해 울어라 하시던 때
해도 빛 잃고 두려워 떨던
그 영광의 그 얼굴, 그 거룩한 승리의 얼굴,
"랍오니" 하며 찾아서 우는 흐린 눈
보면서도 몰라보던 그 부활의 얼굴, 새 생명의 얼굴.

땅 위에 산 얼굴 찾아
헤매이던 내 눈,
피곤에 흐리어 푸른 하늘 바라고,
그 님의 그 얼굴 내 맘에 그리면
그리다 그리다 못해
내 눈에 눈물 어리는 때면
그 영광의 얼굴, 그 거룩하게 산 얼굴
내 눈물 속에 영롱하게 뵈고,
그 광채 내 얼굴 비쳐
내 얼굴 타올라 빛나는 듯하고,
내 마음 시원하고,
이 좁은 세상 넓어지고 높아지며,
저 멀리 저 무한한
저 영원한 가 쪽에 가슴 벌려 서고
그 안의 모든 형상들 모든 얼굴들,
그전에 더럽던 그 모든 얼굴들,
밤 하늘에 별처럼,
달빛에 보는 들처럼,
그 풀잎새, 그 가지, 그 이슬,
또 저녁 바다 넘는 햇빛에 바라는 섬처럼,
그 바위, 그 모래, 그 조개껍질, 그 부서진 배 조각,
한 빛에 들어 그대로 다 아름답듯이
그대로 다 빛나 좋으네!
그 얼굴 그리워, 아아,
그 님의 그 얼굴 늘 바라고 늘 그리며
눈물로 사라지는 슬픔에 씻긴 맑은 눈으로,
눈물에 사라지는 세상 얼굴들 바라보고,
늘 기쁨에 늘 찬송에 늘 사랑에 살고 싶으네.
늘 그리움에, 늘 영광에, 살고 싶으네.
이 바닷가 걷고 싶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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