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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과 악마사이

예수님의 첫번째 시험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 할까?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믿냐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얘기하면서 시험을 합니다.

사탄이 시험하는 것은 구체적인 문제. 굶주림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굶주림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 연탄불을 태워 난방을 했었는데

연탄을 때다가 연탄가스에 목숨을 잃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이런 가난을 해결한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더 열악했습니다.

당시는 '팍스로마나' 시대. 즉, 세금 잘 내고 말 잘들으면 잘 살아 갈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고개를 처들으면 처참하게 식민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멀지 않은 도시인 세포리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그 지역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

십자가를 세우고 수천명을 처형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로마의 폭력과 관련있을꺼란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충격을 받으면 깨집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하는 특징들이 있는데 성격이 사납고 자학합니다.

결국 깨진 것들이 날카로운 것 처럼 마음이 깨진 사람들이 폭력적인 것을 두고 귀신들렸다고 여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분봉왕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분봉왕이라는 말은 지역을 로마가 직접 다스리지 않고 토착세력에게 위임받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분봉와 헤롯은 로마에게 잘 보이고자 신도시를 지어 그들에게 신임을 얻고자 토목사업을 했습니다.

그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아스 이름을 딴 도시를 갈릴리에 짓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의 호수를 디베랴 라고도, 게네사벳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당시 도시를 하나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요. 결국 돈을 구하려면 그 지역의 백성들에게 빼앗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당시 갈릴리의 1인당 GDP는 49.6 데나리온 이었습니다.

1 데나리온은 1일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 현재 돈으로 10만원이라고 따졌을때 496만원.

그리고 세금으로 20%를 떼면 4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400만원.

4인가족 기준 160데나리온.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이 250~300 데나리온으로 보고있는데

얼마나 턱없는 돈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이유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다 밥도 못먹고 기진할까봐 그러셨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팠던 이유는 영양실조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일 할수 이는 사람들이 이런 수준인데 과부나 만성 질환자, 시각장애인, 중풍병 환자, 나병환자는 얼마나 더했을까요.

예수님이 아름답다우신 이유는 이런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갈릴리의 농민들과 더불어서 가는 곳 마다 잔치가 열렸는데

누군가를 위해서 밥을 대접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당시 사회에 원망이 가득한 세대에게 원망 가득한 마음 속에서 서로 상부상조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굶주림을 한번에 해결해 주면 어땠을까.

그러니 사탄이 시험한 것은 정말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왜곡된 신앙으로 쉽게 빨려들어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가 어려울때 마다 마치 기적처럼 나타나 우리를 도와주셔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욕망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자기의 욕망에 따라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종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파트너로 지으셨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뜻을 거절 할 수도 또는 동의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더라도 그 자유를 거두지 않으시고

인간이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져가며 스스로를 성숙하게 만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니 문제를 일거에 해력해 낙원으로 만들어 가려는 것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거절하신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고 얘기하십니다.

떡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란

인간은 겸허해야합니다.

목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까요?

욥은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창조세계를 두고 되묻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조금 보여주신 그것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없는 신뢰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사야가 말했던 것 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에 아들이거든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사탄의 말이 변형된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망하지 않는 니느웨를 보며 화가난 요나에게 하나님은 앞뒤 분간하지 않는 이들조차 아끼신다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회개를 통해 멸망을 비껴간 사건. 이는 자기 삶에 아무런 희망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나는 사건이 바로 요나의 표징일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 길이 가치있는 길이기에 손해를 무릅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영광을 한껏 누리고 싶지만 십자가는 피해가고 싶은 마음. 이를 본회퍼는 "싸구려 은혜" 라고 말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대가를 치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굶주림이 해결될때 좋은 세상이 열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빵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에 요구하는 것에 응답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인간됨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자기의 육체적 욕구를 넘어서서 누군가의 이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내려놓을 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인지 깊이 아는 마음. 그 마음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할 것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양식이나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하나님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