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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설교 정리

주님의 빛 안에서 걷다

본문 : 고후 4:1 - 6

설교자 : 김기석 목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수많은 약자들을 볼모로 잡고있다는 점에서 불의한 전쟁입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경식 선생은 이러한 싸움의 배경을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싸움의 원인은 패권국가의 지배욕, 지도자들의 권력욕, 그 옆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는 물욕이 섞여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명분이 뭐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거덜내고 있습니다. 오늘 막 결혼한 신랑이 나라를 지키려는 모습과 가족들을 피난 보내고 자기는 남아야하는 모습을 봅니다. 전쟁은 기획하고 실행하는 사람들만 안전을 누리고 나머지는 위험에 빠뜨리는 전쟁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모든 국가의 원수는 인민의 비용으로 치르기 때문에 전쟁으로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는 국가 원수는 전쟁 수행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전쟁과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인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이 되어선 안됩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이때문 입니다. 저는 이 전쟁의 소문을 들으면서 요한계시록 9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다섯번째 천사의 나팔소리가 들려올때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의 손에 아비소스의 문을 여는 열쇠가 들려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아비소스는 옛 성경에서 보면 무저갱입니다. 그 무저갱 아래 악마적 세력들이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물쇠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연기가 피어오르고 햇빛을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세상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비소스로 부터 메뚜기 때가 나타나 온땅을 폐허로 만들어버린다고 나옵니다.

  따지고 보면 아비소스는 어디가 있겠지만 우리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마음 내 욕심을 채우고 싶은 마음, 내 욕심을 채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잠겨있지만 어떤 계기로 열려 악마적 존재로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엔 아비소스를 열어 세상을 혼돈으로 만들고 싶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들이 그런 존재들 일것입니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은 세상을 혼돈에 빠질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평화의 질서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그런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제국들이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을 때 평화로운 세상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리와 양이 같이 눕고 표범과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는 세상, 그래서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세상의 꿈을 이사야는 보여주었습니다. 그 꿈은 얼토당토 없어 보이는 꿈일지라도 그 꿈마저 없다면 인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인류의 지향점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꼭 지향해야 하기때문에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요엘, 미가가 똑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모습, 나라들이 전쟁연습을 더이상 하지 않는 세상의 꿈을 꾸었습니다. 제국에 의해 세상이 전쟁통으로 바뀌고 있던 그 때임을 우리들은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제국이 세상을 억압하고 있는 그 때 팔복을 통해 들려주신 말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러주신 까닭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불화의 장벽을 넘어 화해자가 되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만날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 부둥켜 안고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라고 우리를 불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까닭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자기를 밀어붙이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아픔을 그저 부둥켜 안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복음 전파자로서, 담과 담을 넘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때문에 낙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목회자 후보생들을 면담하는 일을 하고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자격심사를 한다는 것은 목회자로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격려하는 자리로서 참석하게 됐습니다. 함께 속해 있던 목사님이 후보생들에게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불렀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어떤 후보생들은 확신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묻는 까닭은 소명이 나를 지키고 붙들어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난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확고한 소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이자리에 모든 분들도 순례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순례자는 자기의 삶에 모든 계기를 중심이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길로 삼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닦고 닦으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의 물결에 속절없이 이끌려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로 사람들에게 숨기록 싶은 일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들 모두 세상 사람앞에 나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간교하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속이고 이익을 확보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말고 진리를 올곳게 드러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냅니다. 진리를 환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를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드봉주교님은 1954년 가장 가난했던 한국에 파송될때 너무나 행복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그 소명으로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 안동 교구에 초대 교구장이 되었고 약자들의 편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을때 항거했고 추방의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90이 넘었지만 환하게 웃는 드봉주교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예수라는 사람에게 탄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라는 사람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라는 사람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 세마디 말입니다. 신학자들의 어떠한 말 보다 이 세마디 말이 더 강렬한 말같이 들립니다. 그래서 90년이 지난 자기의 삶을 돌아 볼때 "기쁘고 떳떳하게 살았어요" 라고 말합니다. 

  떳떳한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날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을 향해 살면서 하늘이 공급하는 명랑함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영적인 어두움에 아둥바둥 살아서는 안되는 거에요. 하지만 여러분 똑같은 복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은 복음이 주는 빛을 모른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눈이 있다고 다 보는것이 아닙니다. 볼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혹은 어둠이나 욕망의 비늘이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안위에만 마음을 썼던 빌라도는 진리의 구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처지가 된 까닭은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둔하다는 뜻은 '살이 찌다.'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에 살이 찌면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보고 '이시대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라고 합니다. 

이시대의 신은 무엇입니까. 이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것은 돈입니다. 돈때문에 가족도 버리고 우정도 버리고 진리도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의 인력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돈과 권력과 출세와 명예에 맛들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복음의 빛을 볼 수 없는 것이죠. 여러분 복음은 멸망 당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희생과 돌봄과 나눔과 낮아짐과 고난이 아로새겨져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권력의 길도 아니고 명예스러운 길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부인의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괴테의 시를 인용합니다.

장미꽃으로 촘촘히 서있는 십자가가 서있다.
누가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였는가.
그 험한 십자가를 부드럽게 감싸기 위하여 화환은 부풀어지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를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국들이 발흥하는 시점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취급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히브리의 지혜자들에게 영감으로 주신 말씀은 왕들만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존엄하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인간의 인권 선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말은 제국들의 저항 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소명도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어느날 하나님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고 얘기하자 예수님은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

  이제 반성적으로 들어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모습이, 우리의 존재자체가 하나님을 가리켜 보여주고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가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을 가리는 불투명한 존재가 된것이 아닙니까?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합니다. 우리는 때로 자기의 편안할 수 있는 자리를 벗어나 약자들의 편에 서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불의에 저항하다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분들은 하늘이 낸 사람들이야. 그들이 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도 하잖아요.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비추면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어떠합니까. 변화산에 올라간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참 얼굴을 본거에요. 그 참 얼굴이 환한 빛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항상 동행하던 주님, 함께 기도하고 배타고 그런 예수님에게서 그전에 느끼지 못한 참 면목을 본거에요. 일상속에서 어느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낸 것 처럼 나도 모르게 은혜에 사로잡혔을 때 나도 모르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은 계시의 순간이 찾아 오는 것 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런 계시의 순간이 온것입니다. 예수님이 실패와 배신과 버림받을 시간을 앞두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폭풍처럼 휘몰아 치는 고난의 현장에서 어둠에 휩싸일 수 밖에 없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불빛 하나를 심겨두기 위해 보여주신 것이에요. 함석헌 선생의 얼굴, 그 얼굴 하나 보기위해 우리가 이세상에 왔답니다. 그 얼굴 본 사람은 그 얼굴을 닮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얼굴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이신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셔야만 빛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야 하고 그 빛 받은 후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돌아서고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이웃들이 삶의 희망을 회복하길 원합니다. 우크라이나 땅에 평화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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