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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11/23일 설교 정리 - 그리스도의 때

 

설교자 : 김기석

본문 : 요한복음 17:1-5

예수님은 오늘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아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주님이 왕이라고 하는 고백하는 것은 

그 압도적인 힘에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가없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지만은 자기를 비워 이땅에 내려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자를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삼아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왕적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복음서중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가장 올곧게 담겨있는 곳을 들으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을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이세상을 떠나 돌아가셔야 할때를 아셨습니다. 그다음 돌아가실때를 아시고 세상에 있는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16장 말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극진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세상에서 내 제자로 사는거 그거 쉽지 않은 일이야.“

나를 믿었기에 모든 어려움으로 부터 벗어날꺼야라고 말씀 안하십니다.

 

어둠속에서 누릴꺼 다 누리며 살고있는 자기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폭로하는 존재들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미움받는 것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별거 아니지만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환난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두려움 속에서도 세상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1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직 제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갈때에 형제들이 자신을 드러내보여야 할 때가 오지 않았냐고 묻지만

그 때가 오지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본문 13장에서 그 때가 오셨다고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때는 보내신문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갈 때 입니다.

돌아갈 때는 바로 죽음입니다. 바로 죽음이야 말로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2절)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영광은 고난을 통하여 오는 것이지 고난 없이 오는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감이 기쁨이 되기 위해선 그분이 맡겨준 것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정말 남김없이 이루셨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폭력으로 이용해 강압하라고 주신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다스림의 권세를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사람들에게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생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사는것. 무한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생은 시간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면 우리의 삶의 시간이 하나님의 삶의 시간속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시간이 뚫고 들어올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서로 고마워 하는 때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내놓고 유무상통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죠.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것입니다. 그 시간은 영생이 뚫고 들어온 순간입니다.

 

그런 자기 마음속에 얼음이 녹은 사람들은 가는 곳 마다 생명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한은 “영생이란 오직 한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는 그와 속속들이 친밀하게 관계를 맺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은 내 고통이고 기쁨도 내 기쁨이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아는 것도

똑같은 얘기입니다.

또한 사랑은 자기애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내 마음을 선물로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안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후회, 두려움이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주님께서 용서하셨기 떄문입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고 미래조차 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얼음이 녹았습니까? 서로를 하나로 부둥켜 안는 따스함이 있습니까?

 

사소한 차이에도 못견뎌 부르르 떨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들은 안타깝게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나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종교는 자기애를 강화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때문에 이에 유혹된 사람들은 자기가 잘 믿는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런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우상에게 굴복한 것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내면의 우상숭배(즉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을 숭배하는 것)가 사회적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랭돈 길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2013, 432쪽)>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인하고 배신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열매를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사람의 말을 통해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사람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이 따뜻하고 겸손하고 포용적인 사람이라면 영생의 경험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따돌리고 함부로 대하고 경멸하고 조롱하는 일들이 주변에 있다고 한다면 오도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는 말이 오용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우상이 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탐욕과 허물을 가리기위한 덮게로 이를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일 뿐입니다.

 

정말로 영광을 돌려드린 다는 것은

영광을 가시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더니 하나님 계신지 몰랐지만

당신을 보니까 하나님이 계실꺼 같아요.

 

현대 세계는 불교가 가르치는 3독 탐진치를 제도화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은 탐내는 것, 진은 화내는 것, 치는 어리석음입니다.

 

오늘의 소비사회는 끝없는 불만족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소비사회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탐심이 지배하면 원망이 생기고 불만이 생기고 적대감이 생깁니다.

여기서 소외된 사람들은 화를 내는 거죠.

조금만 건드리면 화를 낼 것 같이 보입니다. 바보처럼 당하지 않을 꺼야 라고 하면서 화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혹된 것이죠.

 

또한 소비사회는 우리가 영적 존재라는 것을 잊게 하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학력수준이 높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습니다.

삶을 전체로 바라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삶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돈 문제 때문에 갈라서는 사람들.

친구와 우정을 만들만한 여백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분주해 질수록 풍요로워 지는 것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증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기적을 알아차지 못한채 어지러운 속도에 적응하느라 허둥거립니다.

따뜻한말은 사라지며 조롱하는 말만 남습니다.

 

교회가 서있어야 할 곳은 여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만나도록 다리를 만들고

덧없는 인생살이 지친사람들이 영생을 맛볼 수 있도록 돕고

적대감 넘치는 세상속에 살며 지친 사람들에게 환대의 공간을 열어두어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에게 눈물 닦아줘야 합니다.

그게 믿는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기도

주님 때가 왔습니다.

주님 당신을 통해 평화의 세상 만들어 있도록 도와주옵소서.